한류 1세대, 전설적인 가수 패티김 이야기
패티김은 자타공인 전설적인 디바이자 아티스트다. 한국형 팝보컬의 선구자이자 한국 대중가요계 역사의 숱한 '최초'의 타이틀을 기록한 인물이다. 뛰어난 무대매너와 트렌디한 스타일링, 팝을 기반한 보이스 색깔과 넓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으로 격조 높은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1. 패티김 데뷔 초창기
1956년에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여 데뷔하였고, 2년 후 1958년 미 제8군 무대에서 가수 이해연과 듀엣으로 가수 데뷔를 했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 이었다. (본명은 김혜자다)
1959년 1월 초에 미국의 여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패티김'이라는 예명으로 바꾸었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지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2. 패티김의 해외진출
해방 후 1960년, 일본시장에 처음 진출한 것을 비롯해 한국가수 2번째 미국시장 진출,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뤄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였다.
물론 시도에 의의가 있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듯 크게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동양여성으로서 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재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비주얼과 가창력을 두루 갖춘 가수 패티김
지금봐도 이국적인 패티김의 외모는 당시에도 큰 화제였다. 어딜 지나다니면 혼혈이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키도 168cm로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인데 그 시절에는 정말 엄청난 장신이었을 것이다.
이런 탈동양인적 외형이 당시 미8군 클럽에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체구가 작은 동양여성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외형 덕분에 주목을 많이 받았다. 본인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런 부분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3. 패티김의 은퇴선언
2013년, 긴 가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녀는 여러 곡의 히트곡을 냈고 누가 뭐래도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형 여성 가수였다.〈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그대 없이는 못 살아〉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특히 이 중 <그대 없이는 못 살아>는 아직도 LG트윈스와 KIA타이거즈의 응원가로 사용중이다.
4. 패티김 근황
패티김은 은퇴선언 이후 좀처럼 방송에서 볼 수 없었다. 항간에는 패티김 별세 의혹도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던 2022년 11월 26일, 12월 3일, 12월 10일 3부에 걸친 불후의 명곡 패티김 편을 통해 거의 만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함으로써 85세의 나이에도 변함없는 근황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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